어느 시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신문을 읽는다"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다. 뉴스는 스마트폰 알림으로 쏟아지고, 짧은 요약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와중에도 한겨레라는 이름은 여전히 어떤 무게를 지닌다. 그 무게가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보는 일은, 한국 언론의 지난 30년이 남긴 궤적을 더듬는 것과 맞닿아 있다.
1988년, 다른 신문을 만들겠다는 결심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1988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특별한 해였다. 전두환 군사 독재가 끝나고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가 복귀했으며, 언론 통제의 그물이 조금씩 느슨해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기존 언론은 여전히 권력에 순응하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언론인이 그 한계를 안에서 고민했고,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밖으로 나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세우고자 한 것은 단순히 '진보 신문'이 아니었다. 창간사에 가까운 문건들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자주 '독자'였다. 광고주가 아니라 독자가 신문을 지탱하는 구조, 편집국장이 사주의 눈치를 보지 않는 풍토, 기사가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묻히지 않는 편집 — 그런 신문을 만들겠다는 야심이었다.
동업조합이라는 형태를 택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출자자가 소유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기자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구조. 한국 언론사에서 전례가 없던 시도였고, 그것이 완벽하게 작동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출발점에서 한겨레가 제기한 질문 — "누구의 신문인가" — 은 오늘까지 유효하다.
검열의 시대를 지나, 쏟아지는 정보의 시대로
한겨레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 한국 언론이 직면한 위협이 시대에 따라 형태를 바꿔왔음이 보인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가장 큰 문제는 직접적인 검열이었다. 국가안보라는 명목 아래 기사가 삭제되고, 취재원이 불이익을 받고, 기자가 해직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한겨레 역시 그런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신문들이 대체로 순응하거나 모면하려 했던 반면, 한겨레는 그 압력을 기사로 기록했다. 권력이 숨기려 한 것을 지면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그 시절 언론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실질적인 저항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위협의 형태는 달라졌다. 정부의 직접 통제보다 시장의 논리가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광고 수입이 줄고, 조간 신문의 판매 부수가 하락하고, 인터넷 매체가 독자를 분산시켰다. 보수 진영에서는 한겨레를 향해 편향성을 비판했고, 진보 진영에서는 한겨레가 충분히 과감하지 않다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양쪽에서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편집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신문이 겪을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도 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또 다른 문제가 겹쳤다. 소셜 미디어가 뉴스 소비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기사의 가치가 조회수와 공유 횟수로 환산되는 시대가 왔다. 깊이 있는 취재보다 자극적인 제목이 클릭을 부르는 구조 속에서, 장기 취재와 심층 보도를 유지하겠다는 한겨레의 선택은 상대적으로 고독해졌다. 고독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독자의 신문이라는 약속, 그 현실과 한계
한겨레가 내세운 가치 중에서 가장 도전적인 것은 아마도 '독자주권'일 것이다. 신문을 사는 행위가 소비가 아니라 참여라는 인식, 기사를 읽는 사람이 곧 신문의 주인이라는 원칙. 이것은 창간 당시의 선언이었고, 오늘날까지도 한겨레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축이다.
다만 이 약속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충실히 이행되었는지는 단순한 찬반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한겨레 내부에서도 조직 운영과 편집 방향을 놓고 갈등이 있었고, 노동조합의 파업과 사측의 대응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동업조합'이라는 이상과 실제 운영 사이의 거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한때는 경영 위기가 심각하게 보도되기도 했고, 후원회원 제도를 도입하고 디지털 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한겨레가 한국 언론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대체 불가능하다. 다른 주요 일간지들이 사주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보도 방향을 조정하는 동안, 한겨레는 적어도 그런 외부 압력으로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것이 한겨레를 신뢰하는 독자들이 있는 이유이고, 동시에 한겨레에 비판적인 이들이 "그렇다면 왜 다른 신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남은 질문
한겨레에 대한 평가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충실한 독자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간지이고, 비판자에게는 편향된 선동 매체일 수 있다. 양쪽 주장 모두 일리가 있고, 그 일리의 충돌 자체가 언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88년에 기자들이 모여 "다른 신문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 '다름'이 단순한 정치적 색깔을 넘어서는 것이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것, 약자의 목소리를 지면에 싣는 것, 기사가 광고주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것. 그런 원칙이 당연하게 들리지만, 한국 언론의 현실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오늘날 한겨레가 그 원칙을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원칙을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키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상기의 과정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기록할 만하다.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위기는 한겨레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매체가 독자 감소와 수익 하락, 신뢰도 추락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 그 와중에 30년 넘게 살아남은 신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 가능성이 다음 30년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어쩌면 독자가 신문에 참여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