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해할 여지는 남겨둬야 한다

진료실 문을 나서며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한다. “의사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어.” 3분도 안 돼 끝난 상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처방전만 내미는 손. 환자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때로는 분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은 사람에게 그 짧은 만남은 의사를 향한 냉소로 굳어지기 쉽다. 그런데 정작 그 진료실 안쪽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거의 모른다.
의사가 환자의 말을 충분히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대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의사들이 환자 1인당 할애하는 평균 진료 시간은 3~4분 남짓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문진하고, 신체 검사하고, 기록을 남기고, 처방을 내려야 한다. 그들을 압박하는 건 단지 시계 바늘만이 아니다. 전자의무기록(EMR) 화면과 보험 심사 기준, 각종 행정 절차가 진료실을 하나의 공장처럼 만든다. 의사가 환자의 얼굴보다 모니터를 더 오래 바라보는 장면은 이 시스템이 낳은 하나의 징후다.
문제는 비단 시간 부족에만 있지 않다. 한국 사회는 의사에게 유독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의사를 ‘사명자’로 추켜세우면서도 동시에 서비스 제공자로 대한다. “선생님, 제가 아까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요….”라는 말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는 의사의 권위를 쉽게 무시하면서도, 조금만 설명이 부족해도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이런 이중적 기대 앞에서 의사들은 정작 스스로의 한계나 감정을 내보이는 법을 잃어간다. 의과대학에서 질병에 대해서는 수천 시간을 배우지만, 자기 마음을 돌보는 법은 거의 배우지 못한 채 현장에 던져진다.
그 결과는 번아웃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대한의사협회의 2022년 실태조사에서 국내 의사 열 명 중 넷은 심각한 소진 상태에 있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이 소진은 진료 태도에 그대로 반영된다. 지친 의사는 환자의 비언어적 신호를 알아채기 어렵고, 설명은 건조해지며, 공감은 비용이 높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환자는 이를 ‘냉담함’으로 받아들이고, 불신은 깊어진다.
그러나 이 악순환을 개인의 성품 문제로만 돌릴 수 없다. 의료는 본래 불확실성과 함께하는 작업이다. 아무리 검사를 해도 완벽하게 알 수 없는 몸의 상태 앞에서, 의사는 매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부담은 수술방이나 응급실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한 시간 넘게 심폐소생술을 하고도 환자가 사망했을 때, 의사는 바로 다음 환자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해야 한다. 자신의 실패와 슬픔을 곱씹을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의료 현장의 감정 노동이다.
이런 현실을 이해한다고 해서 환자의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해지는 점이 있다. 의사를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단지 그들의 선의나 노력만으로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친절한 의사’가 아니라, 제대로 치료하고 내 몸에 가장 나은 판단을 내려줄 의사다. 그것은 개인의 인성이 아니라, 의사가 온전히 숙고할 수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충분한 진료 시간과 합리적인 수가, 끊임없는 소송 위험에서 조금은 벗어난 환경이 뒷받침될 때 의사의 시선은 비로소 모니터 밖으로, 환자에게로 돌아간다.
의사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조금만 내려놓고, 대신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보면 어떨까. 의사를 성자나 영웅으로 포장하는 대신, 그저 실수할 수 있고 지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 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 그런 조금은 우회적인 접근이 오히려 진료실의 긴장을 낮추고, 두려움에 가려진 대화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결국 의사라는 직업의 무게는 사회가 함께 나누어야 하는 몫이기도 하니까.

Source: HotArticle

Original link: https://www.hotarticle24.com/n1io4vs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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