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이 없던 시절에는 지형에 길을 맞춰야 했다. 산이 있으면 능선을 넘는 험한 재래길이 생기고, 강이 있으면 배를 타거나 크게 돌아가야 했다. 터널은 이런 우회를 없앤다. 같은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줄이면 시간과 연료가 절약되고, 급커브와 급경사가 사라지면서 사고 위험도 낮아진다.
도시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미 건물과 도로가 빽빽하게 자리 잡은 곳에 새 교통로를 만들려면 지하를 뚫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서울의 지하철망, 부산의 해안 도로망 모두 터널 덕분에 가능해진 인프라다. 참고로 한국은 국토의 7할 가까이가 산지라서 터널 밀도가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이다.
터널의 종류
용도에 따라 터널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도로 터널은 자동차 통행을 위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 터널, 인천대교 연결 터널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고속도로의 선형을 곧게 펴주는 역할을 한다.
철도 터널은 열차가 지나가는 통로다. 최근 건설되는 고속철도는 직선 구간을 최대한 길게 잡아야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에 터널 비율이 높다. 경부고속철도 역시 전체 구간의 상당 부분이 터널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 터널과 발전 터널은 물이나 전기를 운반한다. 다목적댐의 취수로, 수력발전소의 수로가 대표적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시설이다.
도심 터널은 지하 도로 형태로, 서울의 사당터널이나 부산의 원효터널처럼 도심 교통 체증을 분산하는 기능을 한다.
터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터널 공사 방식은 지반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산악 터널에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은 NATM(신오스트리아 터널공법)이다. 이 공법의 핵심은 땅속의 암반이 스스로 어느 정도 힘을 견딜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굴착 직후 숏크리트와 록볼트, 강재 지보재로 지반을 안정시키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발파를 하거나 절삭기를 쓰는 등 굴착 방식은 지반 경도에 맞춰 선택된다.
연약한 지반이나 도심 지하에서는 TBM(터널보링머신)이 유리하다. 거대한 원통형 기계가 앞으로 회전하면서 흙을 파내고 동시에 세그먼트라 불리는 블록으로 벽을 조립해 나간다. 발파를 쓰지 않아 소음과 진동이 적고, 굴착면이 매끄럽다. 지하철 공사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바다나 강 밑에는 침매 터널 공법이 쓰인다. 육상에서 미리 만든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를 물속으로 견인해 가서 가라앉히고 연결하는 방식이다. 부산-거제 연륙교 사업이나 일본의 도쿄만 아쿠아라인 같은 해저 횡단 구조물에서 활용되었다.
개착 공법은 말 그대로 땅을 파내고 터널을 만든 뒤 다시 덮는 방식이다. 공사 비용이 가장 저렴하지만 지상 교통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깊은 곳이나 도심에서는 쓰기 어렵다.
터널 안에서의 안전
터널은 출구가 두 개뿐인 밀폐 공간이라 사고 발생 시 대피가 핵심이다.
차량 화재가 가장 흔한 위험 요소다. 터널 안에서 차에 불이 붙으면 즉시 시동을 끄고 열쇠를 꽂아 둔 채 내려 대피하는 것이 원칙이다. 열쇠를 꽂아두는 이유는 소방차나 구조 차량이 필요할 때 차를 이동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대피 방향은 터널 벽면에 붙은 유도등이 알려준다. 화재 지점 기준 후방으로 대피하는 것이 기본이며, 대피 연결통로가 있는 터널에서는 이를 통해 반대편 주행로나 지상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국내 고속도로 터널은 1km 이상인 경우 필수적으로 대피로를 갖추도록 되어 있다.
일상 운전에서는 터널 진입 전에 전조등을 켜고 안전거리를 충분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터널 안은 밝기 변화로 시야가 일시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구간이 있어 사고가 잦다. 또한 터널 안에서는 차선 변경이 제한되는 경우가 많으니 진입 전에 차로를 미리 정해두는 것이 좋다.
세계의 주목할 만한 터널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 터널은 스위스의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이다. 길이가 약 57km에 달하며, 알프스산맥을 관통해 유럽 물류의 대동맥 역할을 한다. 17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16년에 개통했다.
일본과 한국을 잇는 것은 아니지만, 해저 터널의 대명사로는 영불 해협 터널이 꼽힌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해협 바닥을 관통하는 이 터널은 약 50km 길이로, 그중 상당 부분이 바다 밑을 지나간다.
국내에서는 울산의 청량리 언저리를 비롯해 산악 지형 곳곳에 긴 터널들이 분포하며, 평택-제천 고속도로의 월터로 터널처럼 길이가 5km를 넘는 구간도 여럿 있다.
앞으로의 터널 기술
터널 공학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굴착 장비의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TBM의 성능은 나날이 좋아지고, 지반을 사전에 정밀하게 조사하는 기술도 발전해 공사 중 예상치 못한 문제가 줄어들고 있다. 국내에서는 해저터널, 초장대 터널 건설 기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며, 노후 터널의 안전 진단과 보수 기술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 개인 차원에서 기억할 것은 터널 통행 매너다. 터널 안에서 갑작스러운 차선 변경이나 급정거는 연쇄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정해진 차로를 유지하고, 고장이 나면 비상등을 켜고 최대한 갓길로 이동한 뒤 대피하는 기본 수칙만 지켜도 위험이 크게 줄어든다.
산을 뚫고 바다 아래를 지나는 터널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했다는 상징 이전에, 이동 시간을 줄이고 삶의 반경을 넓혀준 실용적인 도구다. 다음에 터널에 들어설 때 잠시 벽면과 환기 시설, 대피로 표지판을 살펴보면 이 익숙한 공간이 얼마나 정교한 설계의 산물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