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기아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가성비 브랜드'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프리미엄 브랜드와 당당히 경쟁하고, 전기차 분야에서는 선도 기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선 브랜드 리빌딩
2021년 기아는 사명에서 '자동차'를 빼고 단순히 '기아(Kia)'로 변경했다. 로고도 바꿨고, 브랜드 슬로건은 'Movement that inspires'로 전환했다. 이건 단순한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다. 회사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사건이었다.
기존 기아가 추구하던 가치가 '합리적 가격에 괜찮은 차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기아는 '이동 경험 자체를 설계하는 것'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PBV(Purpose Built Vehicle), 모빌리티 솔루션, 로보틱스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한 배경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건 아니다. 피터 슈라이어가 디자인 경영을 시작한 2006년부터, 정의선 회장이 그룹 전반의 전동화 비전을 제시한 시점까지, 오랜 축적 과정이 있었다.
EV6와 EV9이 보여준 것들
기아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 기반 모델들은 시장의 평가를 바꿔놓았다. EV6는 2022년 유럽 올해의 차를 수상했고, 세계 올해의 차에도 선정됐다. 한국 브랜드가 이런 상을 받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EV6의 성공 요인을 꼽으면 몇 가지가 있다. 800V 초급속 충전 시스템은 충전 인프라가 아직 완벽하지 않은 현실에서 실질적인 장점으로 작용했다. 18분 만에 10%에서 80%까지 충전 가능하다는 건, 전기차 전환을 망설이던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숫자였다.
디자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아 특유의 '타이거 페이스'를 전기차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디자인 언어는, 전기차가 미래적이고 낯설기만 하다는 인상을 깨는 데 성공했다. 실제로 EV6를 보고 "이 차가 기아 맞아?"라고 반응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EV9은 대형 전기 SUV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3열 시트를 갖추면서도 전기차 고유의 넓은 실내 공간을 극대화했고, V2L(Vehicle to Load) 기능으로 차량 외부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캠핑이나 야외 활동을 즐기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이 기능은 특히 반응이 좋았다.
내연기관 라인업의 변하지 않는 존재감
전기차 이야기가 주목을 받지만, 기아의 내연기관 라인업 역시 여전히 탄탄하다. 스포티지는 글로벌 시장에서 기아의 베스트셀러로, 소형 SUV와 중형 SUV 사이에서 균형 잡힌 상품성을 제공한다. 5세대 모델은 하이브리드 옵션까지 갖추면서 연비 효율성도 높였다.
K5는 한국 시장에서 중형 세단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모델이다. 출시 초기의 디자인 파격이 시장에서 통했고, 지금도 준수한 판매량을 유지하고 있다. 쏘렌토는 패밀리 SUV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며, 가솔린·디젤·하이브리드·플러그인하이브리드 등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제공해 소비자 선택 폭을 넓혔다.
카니발은 미니밴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한국에서 '카니발'은 거의 보통명사화됐을 정도다. 4세대 모델은 SUV 감각의 디자인으로 미니밴의 고정관념을 깼고, 실내 공간과 편의 사양에서 가족 단위 사용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소리 없이 바뀐 품질과 신뢰성
과거 기아가 가졌던 이미지 중 하나는 '품질이 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JD 파워 초기 품질 조사(IQS) 등에서 기아는 꾸준히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조사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차를 오래 타본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보증 기간도 신뢰 구축에 한몫한다. 한국 시장 기준 기본 보증이 3년/6만km이고, 엔진과 변속기는 5년/10만km까지 보증한다. 미국 시장에서는 기본 5년/6만마일, 파워트레인 10년/10만마일 보증을 제공하는데, 이는 업계 최고 수준이다.
디자인 철학의 변화
기아 디자인의 변곡점은 단연 2019년 출시된 셀토스와 3세대 K5 시점이다. 이전까지 기아 디자인이 '무난하고 안전한' 범위에 머물렀다면, 이후에는 과감한 선과 면의 조합, 독창적인 라이팅 시그니처 등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현재 기아 디자인을 이끄는 핵심 요소는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라는 디자인 철학이다. 대비되는 요소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인데, 자연의 에너지와 도시적 세련미, 기술과 감성 같은 상반된 가치들을 하나의 디자인 안에 녹여내는 방식이다.
EV9의 실내에서 이 철학이 잘 드러난다. 넓은 개방감을 주는 플랫 플로어와 하이테크한 디스플레이가 공존하고, 자연 친화적인 소재가 기술적 요소들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어우러진다.
전동화 전략과 미래 비전
기아의 전동화 계획은 상당히 공격적이다. 2030년까지 연간 전기차 100만 대 이상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27년까지 15개의 전기차 모델을 출시할 계획이다. EV3, EV4, EV5 등 보급형부터 프리미엄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전기차가 순차적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소형 전기 SUV인 EV3는 접근 가능한 가격대로 전기차 대중화에 기여할 모델로 주목받는다. EV5는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개발된 모델이지만, 글로벌 시장 확대도 검토 중이다.
더 나아가 기아는 로보틱스와 PBV 분야에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로보틱스는 단순한 로봇 개발이 아니라, 미래 이동성의 연장선에서 자율주행 배송 로봇, 물류 로봇 등을 포함한다. PBV는 특정 목적에 맞춰 설계된 차량으로, 배달·물류·이동 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에서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소비자 경험의 변화
기아를 바라보는 소비자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건 여러 지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시장에서 기아의 평균 판매 가격은 상승 추세에 있다. 단순히 차값이 오른 것만이 아니라, 상위 트림과 고급 모델의 판매 비중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딜러십과 서비스 센터의 변화도 눈에 띈다. 도심형 전시장 확대, 온라인 구매 프로세스 도입, 차량 구독 서비스 시범 운영 등 고객 접점에서의 변화가 진행 중이다. 이런 변화들이 당장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지만, 브랜드 인식의 장기적 전환에는 분명히 기여하고 있다.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기아의 위치
현대차그룹 내에서 기아의 역할은 명확해지고 있다. 현대차가 기술 혁신의 선봉에서 리스크를 감수하는 역할을 한다면, 기아는 그 기반 위에서 더 대중적이고 감성적인 상품을 만드는 포지션을 구축하고 있다.
물론 두 브랜드 사이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같은 플랫폼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는 건, 브랜드 경영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아는 최근 몇 년간 자신만의 색깔을 분명히 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아의 위치는 그야말로 달라졌다. 유럽에서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모델의 인기에 힘입어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SUV와 픽업트럭 라인업 강화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인도에서는 셀토스·소넷 등 소형 SUV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신흥 시장 진출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기아의 변혁은 아직 진행 중이다. 전동화, 디지털 전환, 신사업 확장이라는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지금까지의 궤적을 보면 그 방향성 자체는 분명해 보인다. 자동차를 넘어 이동 경험을 설계하는 기업으로의 전환, 그 과정에서 기아가 보여준 변화는 한국 자동차 산업 전체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